저자: 박범신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날짜: 2010. 04. 06.
페이지: 408p
장르: 한국문학
2017. 10. 30. ~ 2017. 10. 31. 총 2일간 독서
서평
박범신이라는 작가에 대한 나의 과대평가를 깨준 책. 문장력도, 글의 구성도 '잘' 썼다고는 할 수 없다. 베르나르 소설의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었다. 인용된 작품들은 스토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했지만 반대로 지루함을 늘리는 역할도 했다. '박범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느끼기 어려웠다. 메시지를 주기 위해 관련 서적을 인용한 연구자료를 보고난듯했다.
그리고 전체적인 주제가 정말 불쾌하다. 영화로도 나왔기에 한번쯤 읽어나 보고 평가를 하자는 마음에 읽었지만 역시나 불쾌하다. 나이를 뛰어넘는 사랑을 말하고 싶었다면 제자인 인물은 넣지 말았어야했고,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의구심만 드는 내용이었다. 작가 자신을 노인에 투사시킨 걸까? 그렇다면 정말 역겨울 뿐이다.
메모
7p
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 그렇게 믿는다. 아닌가. 어쩌면 겨울이 가기 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9p
"작년 봄에 새로 심은 매화가 있는데"라고 정원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말했고, 의사는 "눈이 오려나봐요." 딴소리로 받았다. 나는 그때 의사가 속으로 하는, 선생은 그 꽃이 피는 걸 보지 못할 거요, 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12p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13p
그는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작가로 살았고, 끝끝내 내 시를 한 편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를 어떻게 용인할 수 있단 말인가.
30p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31p
이번엔 무기(無機)를 무기(武器)라고생각했던 내가 민망해 웃었다.
53p
그 순간의 그애는 목소리까지 덩달아 뽀송뽀송해진다.
86p
시적 천재성에서 내가 '멍청'한 건 사실이지만, 나의 모든 것이 멍청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멍충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어서 당신은 더욱 참을 수 없을 터였다.
90p
그래도 편지, 하고 발음하고 나니까 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혀끝이 달콤하다.
98p
지금 생각하면 시인 이적요의 인생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장면이 그날은 너무도 태연하게 일어났다. 거부할 수 없는 홀림이었어, 그것은. 네가 내 앙가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거지.
100p
사람들이 고결하다고 칭송해 마지않는 시인 이적요의 본질이, 겨우 엽기, 변태적인 호색한에 불과했던가.
109p
과거를 기록하는 역사의 문장과 오늘을 사는 생생한 삶의 문법 사이는 별과 별처럼 멀다. 편지에 담은 나의 이런저런, 역사성을 간직한 문장들은 너의 인생이 아닐 뿐더러 너로부터 아득하게 결절돼 있다. 내 편지가 이 모양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115p
유산균처럼,
생생히 살아 있는 기억이었다. 만약 생애에서 단 한 번 내가 사랑한다, 라고 고백해야 한다면 대상은 그 여자뿐일 것이다.
116p
나를 가슴에 안아서 옥양목 흰 저고리에 담아 몰매로부터 지켜준 고향의 그 여자, D. 이쁜 여자를 보면 그 누나를 연상하는 게 내 평생의 습관이었다.
117p
"이런 식의 폭력은 안 돼!" 그 말은 결국 세상을 가로질러온 나의 나침반이 됐고, 내 평생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됐다.
123p
그애는 대부분 손녀 같았고, 어린 여자 친구 같았으며, 아주 가끔은 누나나 엄마같이 군다고 느끼기도 했다.
135p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느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 …… 없다고.
그러나 미친 상상에 불과했다.
153p
그리고 죽기 전 몇 년은 뜰 안의 소나무들까지 눈엣가시로 보았다. "저것들을 싹둑싹둑 자를까봐. 그늘이 날로 더 깊어져서 싫어. 눈에 안 뵈니까 그렇지, 땅밑으로 파고든 저것들 뿌리는 또 얼마나 악착같이 뻗었겠어? 아마 나와 내 집을 결국은 꼼짝 못 하게 동여매고 말 거야." 말은 그랬지만 이적요 시인은 차마 소나무들을 끝까지 자르진 못했다.
162p
내가 보기에, 은교는 눈에 확 띄는 미인이라곤 할 수 없었다.
163p
열일곱, 혹은 스무 살의 생머리, 눈빛이 누군들 맑지 않겠는가. 은교는 그냥, 밉지 않은, 좀 귀엽고 정결한 이미지의, 그 또래,
보통 여자애,
에 불과했다.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
167p
행복하기는커녕, 들쥐나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나의 내부로 들어와 밥통, 폐, 간, 심장, 큰창자, 작은창자, 콩팥을 조금씩 갉아먹는 것 같다.
168p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아이 참, 영어 단어 암기해요. 내일 영어 시험 본다구요!" 그애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는 김이 팍 새서 위로 말아 올렸던 교복과 브래지어를 끌어내려주고 말았다.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174p
그애가 선생님 집에 들어와 데크의 의자에 앉아 잠든 것도 알고보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183p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엊저녁 쓰다 만 단편소설을 꺼내 다시 읽었다. 불에 태워버리고 싶었다.
196p
여러 날 꽉 막혀 있던 가슴 한가운데
하얀 신작로 하나
시원하게 놓여지는 느낌이었다.
197p
나는 우단으로 만든 토끼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애가 내 주머니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죽음은 더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205p
카페 안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와 은교를 어떻게 볼는지에 대한 염려도 지워져 없었다. 세계엔 나와 은교뿐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욕망을 느꼈다. 내가 지금 하려는 모든 것이 범죄라 해도 내게 공범자가 곁에 함께한다면 무슨 상관인가.
218p
젊은 색깔이라고, 다 화려한 게 아닌데…… 난 회색일 때가 많던데……"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251p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C. P. 보들레르(Baudelaire). <노파의 절망>에서
259p
나는 진실로 청춘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내 정체성에 따른 뜻을 세운 적도 없었다.
310p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314p
'멍청한' 서지우의 머리로는 그 애의 머리칼만을 만졌을 뿐인 순간의, 내 충만감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책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경사 바틀비 (0) | 2020.03.05 |
---|---|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외 11편 (0) | 2020.03.05 |
피로사회 (0) | 2020.03.05 |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0) | 2020.03.05 |
7년의 밤 (0) | 2020.03.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