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2020

타자의 추방

by goyooha 2020. 4. 12.
728x90

 

 

 

저자: 한병철

역자: 이재영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출판날짜: 2017. 02. 27.

페이지: 134p

장르: 철학일반

 

2020. 04. 08. ~ 2020. 04. 10. 총 3일간 독서

 

서평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한병철의 시리즈. 하지만 이번 「타자의 추방」에서는 타자가 사라진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것에서 의미가 특별하다.

대안 없는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비판은 자칫하면 문제해결로 이어지지 않아 독으로 남을 수 있다. 예술과 철학이 미래의 답이라고 말하는 그의 생각을 나는 한 마디로 '아날로그로의 귀환'으로 정의하고 싶다. 현재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가볍고 신속하고 시끄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깊이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헤매고 있다. 그 답을 이 책 속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사유하게 만드는 그의 저서들은 현대사회에 한줄기 빛을 쬐는 구원자같다.

 
메모

8p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빈지 워칭(Binge Watching)" 즉 혼수상태에 이르도록 뚫어지게 보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어떠한 시간 제한도 없이 비디오와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의 취향에 아주 잘 맞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와 시리즈들이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

 

11p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고통은 같은 것을 지속시키는 '좋아요'에 밀려난다.
정보는 단순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에 반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식은 느리고 긴 과정이다. 지식은 아주 다른 시간성을 지닌다. 지식은 성숙한다. 성숙은 오늘날 우리가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성이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시간은 파편화하고, 시간적으로 안정적인 구조들을 제거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간 정책은 성숙과 어울리지 않는다.

12p
하지만 지식은 파악하기다. 빅데이터는 이렇게 사유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은 그렇다'에 만족한다.

16p
포르노 영상의 일반적인 기법인 과잉근접과 과잉조명은 모든 아우라적인 멂, 에로틱한 것의 핵심인 멂을 파괴한다.
(중략)
포르노에서는 모든 몸이 똑같다. 이 몸들은 또한 똑같은 몸의 부분들로 분열한다. 일체의 언어를 빼앗긴 몸은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이 성적인 것은 성별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이를 알지 못한다. 포르노그래피적인 몸은 더 이상 "그 안에 꿈과 신성이 각인되는" 현장도, "호화로운 무대"도, "동화와 같은 표면"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혹하지 않는다. 포르노는 몸뿐만 아니라 소통 자체의 완전한 탈서사화, 탈언어화를 추동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포르노는 외설적이다. 벌거벗은 육체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유희에는 가상이, 비진실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포르노그래피적 진실은 어떠한 유희도, 유혹도 허락하지 않는다. 성과로 간주되는 성 또한 모든 형태의 유희를 몰아낸다. 성은 완전히 기계화된다. 성과, 성적 매력, 피트니스를 명령하는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몸을 최적화해야 하는, 기능적 대상으로 획일화한다.

33p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 증오이며 추하다. 이 적대성은 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

42p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56p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관광객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문턱에 거주하는 호모돌로리스(슬픔의 인간)가 아니다. 관광객은 변신과 고통을 수반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상태에 머무른다. 그들은 같은 것의 지옥을 여행한다.
(중략)
새로운 생산 형태로서의 디지털 소통은 자신을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거리를 철저히 제거한다. 이로 인해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거리가 사라진다. 과잉소통 속에서 모든 것이 모든 것과 뒤섞인다.

57p
그 결과,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위협적일 만큼 가깝게 다가온다. 우리를 차단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세계적인 네트워크 안에 있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투명성과 과잉소통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내면성을 앗아간다.

71p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여기서 블랑쇼는 눈의 주권성을 포기하고 타자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기는 트이한 소외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75p
도처에 시선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사방에서 자신을 주시한다고 느끼는 것은 편집증의 증상 중 하나다. 이 점에서 편집증은 우울증과 다르다. 편집증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병이 아니다. 이 병은 타자의 부정성과 결부되어 있다. 이에 반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타자를 경험할 수 없는, 시선 없는 공간 속에 산다.

83p
"사람들은 어떻게 편지를 통해 서로 교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만질 수 있지만, 그 밖의 일들은 인간의 힘을 벗어난 것입니다. [……] 글로 쓴 키스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요. 도중에 유령들이 모조리 마셔버립니다."

102p
자신으로 존재함은 단순히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은 짐과 부담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103p
우울증은 이런 현대적인 자아의 존재론이 병적으로 전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알랭 에랭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울증은 자기 존재의 피로(fatique d'etre soi)다.

106p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108p
경청은 수동적 행동이 아니다. 특별한 능동성이 경청의 특징이다. 나는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를 경청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

109p
우리는 무언가를 모조리 다 이야기 하지 않았을 때에만 부끄러움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그런 대화의 어떤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갑자기 '잠깐!' 혹은 '여기까지. 더 이상은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럴 때면 우리가 원했던 거리낌 없는 말이 위협받는다.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어떻게 그다음에 다시 혼자가 될 수 있겠는가!

115p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 > 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이 분다, 가라  (0) 2020.04.18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0) 2020.04.14
80일간의 세계일주  (0) 2020.04.08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  (0) 2020.04.04
권력이란 무엇인가  (0) 2020.03.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