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혜진
출판사: 민음사
출판날짜: 2017. 09. 15.
페이지: 216p
장르: 한국문학
2018. 01. 18. ~ 2018. 01. 20. 총 3일간 독서
서평
미쳤다. 이 책을 읽은 첫 날 한 말이다. 미치도록 잘 썼다. 내 머릿 속을 작가가 파헤쳐 글로 옮긴 것만 같았다. 어머니와 딸 그리고 딸의 연인이 함께 있는 집이란 공간은 셋의 관계에 대한 많은 요소를 들춰낸다. 대화를 따옴표가 없이 쓴 것은 막막한 현실에서 느껴지는 어떤 역한 악취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고, 딸이 아닌 어머니의 말로 쓰여진 이야기는 그 세 명 모두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메모
7p
종업원이 뜨거운 우동 두 그릇을 내온다.
8p
어디나 온통 젊은 사람들뿐이다. 주름과 기미로 뒤덮인 얼굴, 숱 없는 머리칼과 구부정한 자세.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누구든 언제든 나를 향해 너무나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내보일 것만 같다.
9p
나로선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 나라의 집세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것은 멈출 줄 모르고 무섭게 자라나기만 한다. 그것을 손에 잡기 위해 달리고 뛰어오르고 점점 더 그 강도를 높여야 하는 게임에서 나는 제외된 지 오래다.
11p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인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얘는 정말 모르는 걸까. 곤궁한 처지, 게으른 성격, 무신경하고 둔한 품성 같은, 남들이 알 필요 없는 너무나 사적인 것들을 왜 이토록 쉽게 드러내 보이는 걸까. 왜 남들이 자신을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 고상함과 단정함. 말끔함과 청결함. 누구나 최고로 치는 그런 가치들을 왜 깡그리 무시하기만 하는 걸까.
14p
성 씨는 아무렇지 않게 퇴근한 어느 날 심장이 멈춘 탓에 죽었다. 심장마비로 정리된 죽음. 도대체 죽음은 얼마만큼 가까이 온 걸까. 왜 이것이 이토록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고 나는 확신하게 된 걸까.
27p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32p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
38p
그럼 우리 같이 들어갈게. 진짜 당분간만. 길게 안 있어. 돈 좀 모을 때까지만 있을게. 세금이랑 월세도 낼 거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나 강의 들어가야 해. 그만 끊어.
우리라니. 한마디 대꾸도 못했는데 전화가 끊어진다.
51p
이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서나 나올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몇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61p
민소매 셔츠와 짧은 바지를 입은 딸애의 팔이 돌아누운 그 애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사이가 좋은 자매. 가까운 친구. 그러나 이 애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런 흔하고 평범한 이유가 아니다.
106p
그냥 있는 그대로 그러려니 봐 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뭐 세세하게 다 이해를 해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며?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며? 다른 게 나쁜 건 아니라며? 그거 다 엄마가 한 말 아냐? 그런 말이 왜 나한테는 항상 예외인건데!
넌 내 딸이잖아. 넌 내 자식이잖니.
107p
이 말들이 바로 나야. 성 소수자, 동성애자, 레즈비언. 여기 이 말들이 바로 나라고. 이게 그냥 나야.
108p
누군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 주방과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소리. 나는 누워서 그 소리를 다 듣는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소리들. 모두가 나를 비난할 것이다. 비웃을 것이다. 엄하게 꾸짖고 벌을 줄지도 모른다.
110p
두 손으로 그 애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짓이기고 그래서 다시는 내 딸과 이 집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고 싶다. 아니다. 나는 이 애를 죽이고 싶다. 내게 끝없는 괴로움과 슬픔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이 애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고 싶다.
115p
환자들은 매일 필사적으로 그곳을 탈출하려고 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를 채운 그곳이 어떻게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병실일 수 있나.
118p
그렇게 마음대로 살 거면 나가서 살아라.
딸애에게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수화기 너머에서 딸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원망을 하고 비난을 하고 심지어 폭언이라 할 만한 말을 쏟아낼 줄 알았던 딸애는 이제 입을 닫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건지도 모른다.
124p
한참 만에 그 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딸애의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은 자신이고 벌써 그렇게 한 지 2년이 넘었다고 말한다.
126p
세상일이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고 그래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
127p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예민하게 알아채고,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 뭐든 모른 척하고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이 나라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이렇게 늙어버렸다.
130p
그러고 보면 나는 매사 너무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굴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어떤 가능성을 하나씩 베어 내면서 일상을 편편하고 밋밋하게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는지도 모른다.
132p
권과장에게 젠을 다른 시설로 옮기면 안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떠들던 순간. 사실 그 순간은 그리 길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잠깐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각오하고 얼마나 큰 두려움을 마주해야 했는지 이곳 사람들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139p
적의와 혐오, 멸시와 폭력, 분노와 무자비, 바로 그 한가운데에 있다. 모두의 가장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들. 바닥까지 내려가면 눈을 번뜩이며 숨어 있는 감정들. 지금 이 순간 눈부신 불빛들이 그런 숨죽인 감정들을 무차별로 깨우고 있는 것만 같다.
141p
뉴스를 보듯이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어떤 세계라고 할 만한 것들이 나를 점점 가운데로 몰아넣고 어쩔 수 없이 중심에 서게끔 만들고 있다.
143p
그러나 딸애의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늘 단축키를 눌러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딸애의 전화번호도 알지 못하는구나. 전화조차 걸지 못하는구나. 그것 말고도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149p
나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안으로 밀어 넣고 힘차게 씹어 삼킨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밥 떠먹는 법을 가르치는 부모처럼.
154p
그렇게 말하는 딸애의 얼굴에서 잠시 긴장이 걷힌다. 지금 이 시각. 뜨거운 불 앞에서 뭔가를 볶고 굽고 튀기고 있을 그 애를 떠올리는 거겠지.
그러나 그런 관계에 희망이 있을까. 언제든 헤어지고 돌아서면 그만인 거 아닐까.
162p
내 잘못이 아니지. 너의 잘못이 아니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그렇게 말한다면 세상의 수많은 피해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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