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2020

마광수 시선

by goyooha 2020. 3. 8.
728x90

 

 

저자: 마광수

출판사: 페이퍼로드

출판날짜: 2017. 01. 07.

페이지: 218p

장르: 한국문학

 

2020. 01. 26. ~ 2020. 01. 27. 총 2일간 독서

 

서평

천재는 천재다. 내가 읽었던 시집 중에 가장 쉽게 쓰여졌으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시집. 난해한 것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

 

메모

46p

<업(業)>

 

개를 한 마리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식 낳고 싶은 생각이 더 없어져 버렸다

기르고 싶어서 기르지도 않은 개

어쩌다 굴러들어온 개 한 마리를 향해 쏟는

이 정성, 이 사랑이 나는 싫다

그러나 개는 더욱 예뻐만 보이고 그지없이 사랑스럽다

계속 솟구쳐나오는 이 동정, 이 애착은 뭐냐

한 생명에 대한 이 집착은 뭐냐

개 한 마리에 쏟는 사랑이 이리도 큰데

내 피를 타고난 자식에겐 얼마나 더할까

그 관계, 그 인연에 대한 연연함으로 하여

한 목숨 내질러 논 죄로 하여

나는 또 얼마나 평범하게 늙어갈 것인가

하루종일 나만을 기다리며 권태롭게 지내던 개가

어쩌다 집 안의 쥐라도 잡는 스포츠를 벌이면 나는 기뻐진다

내 개가 심심함을 달랠 것 같아서 기뻐진다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불쌍한 쥐새끼보다도

나는 그 개가 내 개이기 때문에, 어쨌든

나와 인연을 맺은 생명이기 때문에 더 사랑스럽다

하긴 소가 제일 불쌍한 짐승이라지만

내 개에게 쇠고기라도 줄 수 있는 날은 참 기쁘다

그러니 이 사랑, 이 애착이 내 자식 내 새끼에겐 오죽 더해질까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자신 없는 다짐일지는 모르지만

정말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모든 사랑, 모든 인연, 모든 관계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도록 이를 악물어 봐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내 성욕 때문에

내 고독 때문에, 내 무료함 때문에

한 생명을 이 땅 위에 떨어뜨려 놓지는 말아야지

 

67p

<인생에 대하여>

 

세상에 태어날 때

 

나는 슬피 울었지만

 

모두가 웃었고

 

세상을 떠나 죽을 때

 

나는 너무 기뻤지만

 

모두가 슬퍼했다

 

64p

<술>

 

술을 마시기 위해서 안주가 있는 것인지

안주를 먹기 위해서 술이 있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너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된 것인지

사랑을 하기 위해서 너를 만난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사랑은 이런 게 아닌 것 같았는데

만나서 뽀뽀나 하고 장미여관에나 가고

이런 건 아닌 것 같았는데

더 숭고하고 고상하고 애틋한

아, 그래 마치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그런 천사 같은, 성모 마리아 같은 여자와 만나

"유 아 마이 데스티니"해 가며

전심전력(全心全力), 이심전심以心傳心),

영혼을 바쳐야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만나 봤자 그저 그렇고 그런 이 사랑

남인수의 노래 <청춘고백>에 나오는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 허고"라는 가사

같은 시큰둥한 이 사랑

그래도 네가 떠나니 허전하다 만날 땐

별 것 아닌 것 같았는데

막상 곁에 없으니 너무나 고독, 적막, 쓸쓸하다

그래서 난 오늘도 혼자서

김수희의 <멍에>를 들으며

청승맞게

술을 먹는다

안주를 마신다

 

113p

<칵테일 마시기>

 

'오르가슴' 한 잔 주세요. '오르가슴'은 대체 어떤 술이죠?

'오르가슴'은 두 개의 층으로 되어 있지요. 첫 번째는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 층이고 두 번째는 마치 목 안에 불을 지피는 것 같은 뜨거움을 맛볼 수 있는 위스키 층이지요. 굳이 사족을 달자면 크림층은 전희(前戲)를, 위스키 층은 절정을 의미하지요.

그럼 물은 왜 따라 나오죠? 술의 양이 너무 적어서 그런가요?

글쎄요……, 목 안 가득히 화끈하게 달아오른 뒤에 마시는 물 한 모금은 후회(後悔)를 뜻하는게 아닐까요.

후회(後悔)라고 했나요? 후희(後戱)가 아니고?

후회(後悔)지요. 후희(後戱)가 아니라.

 

137p

<다시 비>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안 쓴 우리는

사랑 속에 흠뻑

젖어 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같이 쓴 우리는

권태 안에 흠뻑

갇혀 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따로 쓴 우리는

세월 속에 흠뻑

지쳐 있다

 

150p

<물과 불>

 

불같은 정열로 당신에게 달려들었습니다만

당신은 너무나 차가운 물이었습니다.

당신을 100도까지 끓게 만들 자신이 있어

나의 온 청춘을 불살랐습니다만

당신이 겨우 30도쯤 되었을 때

나는 그만 벌써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형편없이 늙어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자 당신을 눈독들이던 어떤 사람이 어느새 냉큼 달려들어

당신을 100도가 되게 끓여 놓더군요.

일단 데워진 물을 완전히 끓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요.

마치 그 육중한 무게 때문에 꿈쩍도 않을 것 같은 기차도

일단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아주 쉽게 미끄러져 나가듯이 말입니다.

누군지 그 사내는 운 좋은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무정한 당신, 얄미운 당신!

나는 당신이 그 사내와 함께 사랑의 열탕(熱湯) 속에서

희희낙락 노니는 것을 쓸쓸히 바라볼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죽고 싶을 만큼 슬프지만은 않아요.

 

나도 이젠 철이 들어

물과 불의 영원한 만남이란 없다는 것, 결국

물이 불꽃을 죽여 버리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지요.

당신의 그 차가운 냉기(冷氣) 때문에 결국은 죽어 버릴

그 사내는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미리 지쳐 버린 덕분에 나는 살았습니다.

 

154p

<그 이름 그 얼굴>

 

누구더라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외우던 이름인데

 

어떻게 생겼더라

거울처럼 매일매일

마주 본 얼굴인데

 

차마 잊을 수 없었던

기억들이

빗방울처럼 떨어져내린다

 

시간의 무게는 무서워

세월은 살 같이 빨라

이제는 생각나지 않네

 

흩날리는 봄 꽃잎

흩날리는 가을 낙엽

흩날리는 겨울 눈발

 

둘이서 바라보며 다짐했던

세월을 초월해 흩날리지 않고

평생을 같이 하자고 했던 그 약속

 

누구더라

어떻게 생겼더라

이제는 생각나지 않네

 

안타까운 추억들

늙어버린 기억들

지쳐버린 나날들

' > 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0) 2020.03.08
수사학/시학  (0) 2020.03.08
인간 본성의 법칙  (0) 2020.03.08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1  (0) 2020.03.08
명상록  (0) 2020.03.08

댓글